“울 밑에 선 봉선화야~”
‘상계동 슈바이처’로 평생을 봉사해 온 팔순의 노의사. 최근에는 아산재단이 수여하는 복지대상까지 수상한 김경희(82세) 원장의 인턴 시절은 어땠을까? ‘인턴 시절’ 인터뷰를 제의하자, “그 당시에는 인턴제도 자체가 없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른 말을 바꾸어 “병아리 의사 시절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얘기해 달라”고 하니, 환자가 거의 없는 오후 6시에 오라고 한다. 1943년에 의과대학(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김경희 원장의 ‘병아리 의사’ 시절 얘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 약 력 ◆
·세브란스의전 졸업(1943)
·김경희 내과 의원 개설(1947)
·일본경도대학의학부 의학박사학위 취득(1957)
·은명장학회 창설(1985)
·은명심장수술후원회 설립(1986)
·정동교회 중계동무료진료소소장(1990)
·상계동 은명내과 개설(1984∼현재)
1936년 1월 어느날 서울 정동교회. 한말(韓末) 궁의(宮醫·한의사)의 손자 김경희(당시 배재고보 3학년·16세)는 “하나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나이다” 하고 기도로 약속했다. 식민 치하에서 가난 때문에 치료 한 번 못받고 결핵에 걸려 숨진 친구들, 스스로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중생(重生) 체험’이 그를 바꾼 것이다. 4년 후 세브란스의전(醫專·연세대 의대 전신)에 진학한 그는 평생 이날의 약속을 지켰다.
1941년(의전 2학년) 서울 답십리 조선보육원 아이들 치료에서 시작, 광복 후 일본과 만주에서 귀국한 무의탁 동포 무료 진료, 6·25전쟁이 끝난 뒤 일본 교토대 의학부 대학원 유학, 박사학위 취득. 귀국한 의학박사 김경희는 1973년 다시 왕진 가방을 들고 영세민과 피란민이 엉켜 살던 서울 답십리·청계천·망원동·한강 뚝방 판자촌에 뛰어들었다. 10년 동안 전국을 돌며 무료 진료…. 그는 1984년 ‘은명내과’ 간판을 내걸고 처음 정착했다. 그곳은 당시 판잣집이 즐비하던 서울의 대표적 빈민촌, 상계동이었다.
처음엔 영세민들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정작 “누굴 거지로 아느냐”며 정색을 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살려줄 진료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던 김 원장이 반짝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1000원 진료’였다. 어떤 치료를 받든 진료비는 1000원. 그가 ‘상계동 슈바이처’란 별명을 얻은 것은 이웃의 마음까지 돌보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헌신은 의술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5년 은명장학회를 설립해 200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심장수술후원회를 결성해 선천성 심장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1996년에는 모든 재산(부동산)을 학교와 종교 단체에 기증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2000년에는 영세민촌인 중계본동 104번지와 상계1동 노원마을의 가난한 100가구를 ‘은명마을’이란 이름으로 한데 모으고, 이들의 건강과 살림살이, 경조사를 챙겼다. 그가 병원, 장학회, 공동체에 붙인 ‘은명(殷明)’이란 이름은 부친(김은식 장로)과 모친(서명신 권사) 함자에서 따온 것이다.
주민들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원장 진료를 받아온 중계본동 박진심(여·78)씨는 “그렇게 좋은 분이 또 어디 있나, 빨리 건강을 찾으셔야 할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독거노인 조광균(여·80)씨는 “몸으로 봉사해준 양반이었는데, 빨리 나으시라고 우리가 기도할 차례”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지난 1994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이제 내 나이 75세, 기력은 날로 쇠해 가는데, 절대 빈곤의 판자촌은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고, 더구나 이 안에는 병까지 가진 혼자노인들이 너무나도 많은데…”라며 탄식했었다. 그후 10년, 그는 결국 후계자를 구하지 못했다. 지난 3월 보령의료봉사상 수상 직후 가진 보령제약 사보(社報)와의 인터뷰에서 김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손이 안 가면 (은명의 봉사활동이) 멈추겠지요. 그러면 그동안 도움을 받던 (가난한) 사람들이 영향을 받겠지요. 하나, 그것(훗날)은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백발과 구부정한 허리로는 김 원장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지만, 목소리만 들어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목청이 좋다. 그의 의원 환자 대기실에는 다른 곳과 다른 소품 하나가 시꺼멓게 입을 벌리고 있다. 그것은 대기실에 앉아 있는 환자를 부르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퍼져 나오는 스피커다. 당연히 진료실 안 김 원장의 책상에는 낡은 마이크가 놓여져 있었다. 10여년간 이런 방법을 써 왔다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냥 편해서’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것도 환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환자들은 자신이 믿는 의사의 목소리만 들어도 낫는 법이니까.
3년 6개월만에 의사 되다
인턴 제도가 없었던 1943년에는 부수(지금의 인턴), 조수, 강사, 조교수, 교수 순으로 단계가 높아졌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의과대학이 4년제였는데,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자마자 졸업장과 함께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고. 의사가 워낙 모자라던 시절이라 그런지 실제로는 3년 6개월만에 졸업을 했다는 김 원장은 ‘그래서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다른 교육시스템이 또 하나 있다. 인턴 때 각 과를 돌며 경험하는 임상교육을 의대 시절에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전공과를 선택할 수 있었고, 대학 병원에서 전공과 ‘부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수’ 과정에 들어가는 동료는 각과마다 1∼2명 정도로 통틀어 1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단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벌써 시각은 6시 20분. 질문과 답변이 모두 빨라지기 시작했다.
병아리 의사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내과 부수를 할 때 간경화 환자를 봤어요. 배에 물이 차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희망을 갖고 열심히 진료했죠. 그런데 어느 날 회진을 돌다 보니 그 환자가 없어진 거예요.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어서 알았는데, ‘낫지도 않는 병을 고치려고 애쓰는 선생님 보기 민망해서 나가야겠다’고 했다더군요. 아무리 중한 병이라도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어야 하는데,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 병원 문을 나선 그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니 참 측은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의사들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병을 치료하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일 덕에 자만심도 없어지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도 더 커졌죠.
그 시절을 생각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일은?
일제치하에서 일종의 저항에 의미로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함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하는 노래를 흥얼거렸죠. 1년 가까이 날마다 그랬죠. 그 때가 가장 그립죠. 또 하나는 지금의 아내를 환자의 보호자로부터 소개받은 일이지요. 장티푸스 환자가 왔었는데, 그 환자의 남동생이 누이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의 아내와 살게 된 거죠. 환자가 제 중매쟁이였던 셈이죠, 하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의사
전인치료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의 질병을 초월해서 사람의 심상까지 치료해 준다는 의미죠. 더 쉽게 말하면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치료인 거죠. 환자를 대하면서 쭉 전인치료를 해야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죠. 환자에게 인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까지 챙겨주는 것이 이상적이고 좋은 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전인치료도 중요하지만 의사는 우선 환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기본으로 있어야 한다고 봐요. 물질과 타협하지 않고 환자를 생각하는 그 순수한 마음 그대로를 간직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후배의사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환자를 대하는 태도?
기본적으로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젊었을 때는 순수하잖아요. 금전·명예를 떠나 인간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 정의감도 넘치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욕심도 생기고 나태해지죠. 그런데 저같이 나이를 ‘더’ 먹으면 욕심이라는 것은 다시 없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는 일본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병든 몸으로 귀국해 20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당시만 해도 시골이었던 상계동에 은명내과를 연 이후 평생을 상계동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은명’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의 함자에서 한 글자씩을 따 온 것이다.
평생을 욕심 없이 살아왔음직한 그가 ‘나이가 들면 욕심이 없어진다’고 얘기하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욕심’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있었다고 해도 그의 욕심은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으리라.
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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