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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심한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던가요?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킨 안이숙 사모가 쓴 책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일본제국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에서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가장 먼저 기독교 조직을 와해시키기로 작정합니다. 많은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무섭게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열렬히 믿던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숨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무슨 계획인지 알 수 없으나 구속했던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일시적으로 풀어 줍니다. 숨어 있던 신도들이 풀려난 분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옥중 고난을 듣습니다.

 

안이숙 씨도 깊은 밤에 고문을 아주 심하게 당했다는 이유택 목사님댁을 찾아갔습니다. 깊은 밤중에 모여든 신도들도 신앙을 위해서 구속될 각오를 했던 사람들이라 이목사님에게 여러 가지 고문당하던 일과 감옥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이유택 목사님은 어찌나 지독한 고문을 당했던지 풀려나온 것 자체를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질문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심한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던가요?”

 

모두 긴장과 고요 속에서 숨을 죽이며 답변을 기다립니다. 이유택목사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한참을 머리 숙여 깊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낙심 마십시오. 아무런 이적도 내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믿기를 내가 그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큰 권능을 나타내어 고문을 아프지 않게 이겨내도록 해주실 줄로 믿었으나 그런 것이 아니드만요. 얼마나 아프고 견디기 어려웠던지 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웠어요. 나는 ! 주여 속히 내 영혼을 거두어 올려주시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겁이 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참으로 힘들었어요.”

 

이 말을 듣자 안이숙씨는 마치 보자기로 확 씌우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여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듣고 본 바를 전하자 어머니는 참으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서 안이숙씨를 타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사람의 모든 경험을 하신 후에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 얼마나 아프셨고 어려웠을까. 우리도 부활하기 전에는 신이 될 수 없으니 사람으로서의 고난은 그대로 다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픈 것을 견디는 것이 희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추가) 안이숙 사모는 1908년 평북 박천에서 물산객주의 넷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랐고 경도여전과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선천보성여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던 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고 1940년 2월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정치인들을 상대로 일본의 침략행위와 기독교 박해에 대해 항의했다. 급기야는 일본 국회의사당까지 걸어들어가 일본 당국의 기독교 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려 체포된 후 국내 평양형무소로 압송된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그녀의 신사참배 거부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6년간 옥고후에 결국 8,15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뒤늦게 김동명 목사와 결혼해 로스앤젤레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해 미주 한인사회를 이끄는 사역을 담당하게 된 안이숙 사모는 한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전도 간증집회를 열었고 대전에 새누리침례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자신을 '실격된 순교자'라고 불렀으나 '살아있는 순교자'로의 증거를 받았던 안 사모는 마지막까지 왕성한 선교활동을 벌이다 1997년 10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