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TV 대담 프로에 화곡동교회 윤주홍 장로님이 출연했읍니다.
이분은 고등학교때 일찌기 예수믿고 은혜를 받은 후에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가 되고 싶은 소망이 불타오르더랍니다. “내가 의사가 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종이 돼야겠다”고 결심하고 의예과에 시험을 치게 되었읍니다. 다른 과목은 자신이 있었는데 생물이 너무 어렵고 자신이 없었답니다. 하여간에 최선을 다하여 답안지를 작성하여 놓고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공백란에 “꼭 합격시켜 주십시요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는 훌륭한 의사가 되겠읍니다.” 정말 합격이 됐습니다.
그리고 의학을 공부한 후에 의사가 됐고 개업을 했습니다. 처음엔 고아원을 도와주고 봉천동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훌륭한일을 많이 했습니다. 환자도 많아지고 돈이 잘 벌리면서 처음의 좋은 뜻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좋은일은 돈 많이 번 다음에 하지” 하다가 마침내는 돈벌 생각에만 몰입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로 어린아이가 죽었다고 응급처치하러 들어왔는데 보니 이 의사의 3째딸이였답니다. 이때 큰 충격을 받고 회개하여 다시 고아원을 도와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후 이분은 오늘의 슈바이쳐라고 TV에 소개 될 정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광을 받은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의사가 되면 가난한 이들을 돌보겠다고 서원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의사가 되자 돈을 벌기 위해 주일까지 범했다. 1974년 어느 날 기사가 교통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응급처치 하다가 천지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아이는 그의 딸이었다.
“오, 하나님!” 청진기를 댔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사 가운을 벗고 병원문도 닫았다. 이듬해 봄, 딸아이 무덤에 다녀오는 길에 열이 펄펄 나는 어린 소녀를 안고 울고 있는 가난한 할머니를 만났다. 선배 병원에 아이를 업고 가서 “치료비를 부담할 테니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할머니와 소녀가 병원을 찾았다. “아저씨도 의사야? 그런데 의사 옷을 안 입어? 청진기도 귀에 안대네.” 그는 소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오랜만에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댔다. “아!” 그 순간 천지를 깨우는 듯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오, 하나님! 작은 자를 돌보지 않고 세상을 따르던 저를 이제야 깨우십니까.” 그는 당시 빈민들이 몰려있던 봉천동에 병원을 다시 세웠다.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아이와 어른이 없을 정도였다. 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장로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명을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상처(scar)를 통해 별(star)처럼 빛나게 하신다.
[출처] - 국민일보 겨자씨
가난하여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에겐 ‘하늘’인 셈이었고, 그 일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이었다. 가령 1500원을 치료비로 받아야 하는데 500원 밖에 없다 하면 ‘1000원을 탕감해줄 테니 예수 믿어라’ 하였다. 수술하고도 돈이 모자란다, 하면 또 그리 하였다
국문학도 의사가 되다.
본래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나, 특별한 계기로 소명을 받아 의사가 되었다. 그 특별한 계기는 30여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30여년 전, 봉천동에는 청계천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 동네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버스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내리게 되었고 그 곳이 바로 봉천동이었다. 사방이 판잣집인데, 박스로 만든 어느 집에 사람의 발이 나와있어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쪽방에 다섯식구가 자고있는데, 키가 큰 아들의 발이 나와있던 것이었다. 그때 그것을 보고 결단을 했다고 한다. 그들을 위해 의사가 되어 살겠노라고 하고, 의대에 편입해서 의사가 되어 그 동네에 의원을 세웠다.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해 주고, 가난한 주민에게는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다. 72년부터 정기적으로 서해안 섬들을 순회하며 진료 봉사를 하고, 나중에는 장학회를 설립해서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의료계에서 명성 있는 의사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빛을 내며 살아가는 의사일 것이다.
2인조 강도도 알아본 슈바이처
병원을 차리고 난 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은 폐렴이 심한 환자를 치료하러 판자촌으로 왕진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2인조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칼을 들이대고 윤 원장을 위협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다른 한 강도가 어둠 속에서 윤 원장을 알아보고 폐렴에 걸린 노인을 무료로 치료해 준 고마운 의사라며 그를 놓아주었다. 무보수 치료의 대가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지켰다며 윤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 웃었다.
봉사란 무엇인가.
“카뮈와 슈바이처는 둘 다 노벨 수상자였어. 카뮈는 평생 자신만을 위해 돈을 쓰다 차 사고로 죽고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죽었지. 어떤 인생이 더 값진 것일까?”
‘봉사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답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게 비교해 보니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의사로 태어나고 싶다는 윤주홍 박사. 그는 부유한 의사는 아니지만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한 의사라 말한다.
“ 봉사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거라네. 소멸시키지만 더 큰 빛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지난 94년부터는 관악 장학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2,0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가진 시간과 몸, 경제력의 3분의 1 이상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국으로 먼저 간 딸.
병원 앞 큰길에서 자동차의 급하고 소름 돋는 정지음이 울렸고, 곧 운전수로 보이는 사내가 피로 얼룩진 아이를 안고 들어왔고, 병원 침대에 누였는데…, 그 아이가 셋째 딸이었다. 아이의 심장에 청진기를 대었을 때 심장은 이미 정지되었다. 심장파열이었다.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남았다. 교회 갈 때도 아빠 손을 잡고 걸을 만큼 유난히 아빠를 따르던 아이였다.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대는 3월 어느 날, 개나리 따러 간다며 꽃신을 사달라던 아이는, 아빠 앞서 그가 온 길을 그렇게 돌아서 가버렸다.
아이를 먼저 보낸 뒤 가운을 벗었다. 병원 문을 닫고 아이가 묻힌 묘지를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았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를 오가면 하루해가 저물었고, 그렇게 꼬박 1년을 보내었다. 꼭 1년째 되는 날,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아이가 잠든 그 자리를 다녀오던 날이었다.
시골길에 양치기가 양 대여섯 마리를 이끌고 앞서 걷다가 도랑 앞에 멈추었다. 양이 도랑을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질 하였다. 양치기는 능숙하게 나뭇가지 두 개를 놓더니 새끼 한 마리를 먼저 건너보냈다. 그러자 나머지 양들이 도랑을 건넜다. 그 광경 뒤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래, 아이가 먼저 천국으로 간 게야,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아이가 먼저 간 게야,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튿날 다시 가운을 입었다. 비로소 마음 가득히 평화로운 봄 햇살이 와 닿았고, 감사의 기운으로 화사하였다. 아이를 친 운전수를 법정까지 찾아가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 택시기사를 용서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여러 번 제출했다. 그후 그 기사는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딸아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수많은 아이들을 딸로,아들로 삼고 진료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동네 아이들이 장로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불어버린 자장면 한 그릇.
어느 해인가, 목련이 아직 살았을 때였다. 누군가 이사를 가면서 목련나무를 남겨주었다. 그 나무를 옮겨 심고 있는데 한 소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철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급히 책상 위에다 자장면 한 그릇을 놓고 떠나려 하였다.
“얘야, 난 자장면 안 시켰는데?”
그러자 소년은 “선생님!” 하며 눈물이 그렁거렸다.
“왜 그러느냐?”
그는 소년을 알지 못하였지만 소년은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소년이 고아원에 있을 때 맹장염으로 많이 앓았을 때 그 고통을 삭혀주고 수술해준 분이었으므로. 소년은 그 고마움을 늘 품고 살면서 어떻게든 갚고자 하였단다. 고아원을 나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거스름돈을 팁으로 받아 모았다가 자장면 한 그릇 값이 되었을 때, 소년은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을 생각하였다. 자장면을 좋아하신다던 선생님을 위해 소년은 자장면을 철가방에 넣은 뒤 길음동에서 버스로 서울역까지 와서, 다시 갈아타고 봉천동네거리에 와서, 또 다시 땀을 흘리면서 병원까지 뛰어온 것이었다.
소년의 마음을 생각하면 먹을 수도 없는 그 자장면 한 그릇을 비워냈다. 소년의 마음에 그의 눈물까지 담긴, 세상에서 가장 맛난 자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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