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나를 위해 기도했어요_통일 기관사의 꿈

예화지기 2018. 10. 20. 15:23

"처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했어요"
21살에 하반신 마비된 청년의 '통일 기관사' 꿈

 

우리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 또한 스물 여덟해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행복하게도 가슴속에 ‘사랑’이라고 새길 수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중에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규명이’가 아닌 ‘우리 규명이’라 불렀던 사람. ‘맥주’ 대신 ‘소주’에 ‘시큼한 깍두기’를 떠올리게 하는 젊은 친구, 내 동생 그리고 동지.

 

바로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www.heemang21.net)에서 함께 생활했던 정규명(22)이라는 친구입니다. 그가 간직한 깨끗한 마음과 삶에 대한 긍정,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을 오늘 당신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초록물고기’‘겨레지킴이'

 

내가 규명이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7년 우리 단체에서 열었던 '청소년 열린학교' 문학교실에서였습니다. 작지만 다부진 몸을 가진 곱슬머리의 고등학교 2학년짜리 남자아이는 첫 만남부터 선생님이었던 나를 누나라고 불렀습니다. ‘키작은 왕자의 꿈’이라는 자신의 습작시를 발표하면서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던 아이였습니다.

열린학교를 통해 만난 우리의 인연은 곧 규명이의 단체생활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서울지역 20여개 학교에서 벌이던 '청소년 겨레지킴이'(97-98년까지 벌어졌던 외제필기구 안쓰기, 정신대 할머니 돕기, 민족문화 사랑하기 등의 운동입니다) 운동에 참여한 규명이는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겨레지킴이 운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단체 선배들을 참 잘 따랐고, 작은 것이라도 학교에 돌아가서 실천하려던 모습을 지닌 규명이는 곧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선배들이 규명이를 사랑했던 이유는 좀 특별했습니다. 바로 규명이의 삶과 꿈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라도 삼례, 3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자란 규명이의 꿈은 바로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그리고 고모와 삼촌. 이렇게 모두가 모여 사는 아주 예쁘고 큰 집을 짓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꿈은 규명이네 식구가 서울로 오면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께서 규명이와 형을 데리고 서울로 와서 자리잡은 곳은 바로 ‘가리봉’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김치 공장에서부터 포장마차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지만 언제나 단칸방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대가족에서 자란 규명이는 절망하기보다는 삶을 긍정했고, 넉넉한 여유와 정을 가지고 살아갔기에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규명이의 어려운 사람, 낮은 사람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런 규명이가 자신과 정말 비슷한 사람을 발견한 것은 바로 영화 ‘초록물고기’였습니다. 막동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고 싶었던 소중한 꿈이 깨어지는 서울의 생활. 이 영화를 몇 번씩 보며 눈물을 훔쳤던 규명이의 마음은 단체에 오면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노동자’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선배와 후배가 함께 같은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시인의 길과 노동자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던 규명이는 마침내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먼저 노동운동의 물꼬를 텄으나, 아직 민주화되지 못한 ‘철도노동조합.’규명이는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재수를 시작하였습니다.

배 고프고 졸릴 때마다 떠올린 약속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국비 장학생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규명이는, 새벽엔 신문배달을 하며 재수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공부를 위해 1년 동안은 단체에도 나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규명이가 ‘철도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했던 생활은 70년대에나 볼 수 있는, 정말 가슴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새벽에 신문배달을 마치면, 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듣고, 점심 시간이 되면 옥상에 올라가 물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독서실 사용료를 다 내지 못해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밤을 새워 공부를 했습니다.
‘남들이 다 먹는 점심, 나도 먹어봤으면... 마음 편하게 독서실에서 공부해봤으면...’

그런 설움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벗들과 함께 했던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철도 노동자가 되어 민주 노조를 만들고 싶다는 꿈, 통일이 되면 북쪽으로 가는 기차의 기관사가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을 떠올리며, 열심히 청소년 운동을 하고 있는 선배와 친구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규명이는 2000년도에 철도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철도대학이라는 특수한 곳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지만, 규명이는 곧 특유의 인간적 매력과 따스한 사랑으로 철도대 친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규명이처럼 어려운 집안 환경의 아이들이 유난히 많은 철도대 친구들에게 큰 애정을 가진 규명이는 하루 하루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반신 마비, 그러나 다시 일어서리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았던 규명이에게 크나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2000년 8월말, 폭풍이 불던 날, 바람이 아주 많이 불어 간판이 떨어지고 잠을 이룰 수 없던 밤.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배달을 하던 규명이에게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길가에 세워놓은 버스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곧 안양의 큰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부모님이 돈이 없음을 알고 병원쪽은 규명이를 방치해두다가 다음날 작은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규명이는 목뼈를 너무 많이 다쳐서 곧 수술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긴 규명이는 수술을 했으나, ‘하반신 마비’라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스물 한살의 피끓는 청춘에게, 한평생 하반신을 쓸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결과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축구 소년’이라고 불릴 만큼 축구를 잘 했던 규명이, 동네 고아 아이와도 축구로 친해지고, 철도대학에서도 축구로 우정을 다지던 그에게, 하루라도 몸을 움직여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열정으로 가득찬 젊은이에게 운명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습니다. 가혹한 운명에 대해, 언제나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자에게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행을 용납하고 인정하기에는 그 슬픔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 규명이’는 곧 일어섰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오히려 걱정하는 벗들과 부모님을 걱정했습니다. 2000년 마지막날, 병원으로 찾아간 나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나, 저 사실은 고백할 게 있어요. 병원에서 예배보는 날, 내가 신자는 아니지만 기도를 했어요. 근데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저를 위해 기도했어요. 너무 나쁜 마음인 줄 알지만, 정말 간절하게 저를 위해 다시 걷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때, 그렁이는 눈물 때문에 더욱 맑아진 규명이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남들 군대간 것처럼 생각하려구요. 3년이면 일어날 수 있겠지요? 누나들이 그런 얘기 많이 했잖아요. 사람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거... 저, 꼭 다시 일어설 거예요. 꼭 통일 기관사가 될 거예요.”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하는 규명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말 큰 힘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나이 스물 두살이 된, 한평생 하반신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젊은이의 삶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깊고 큰지 알았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언제나 선배를 위로하고, 병원에서조차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던 착한 규명이는 지금, 재활원에서 재활치료 중입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여 이메일을 보내고, 핸드폰을 거는 것이 아직도 힘들지만 규명이 특유의 열정과 넉넉함으로 잘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한평생 훌륭한 노동자로 살고 싶다고 약속했던 규명이. 그런 규명이 앞에 깨끗하고 양심적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던 모든 친구들, 선배들. 우리는 오늘도 규명이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규명이는 다시 일어나, 통일 열차를 운전하는 멋진 기관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날을 위해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고 있는 규명이에게 깊은 사랑과 믿음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