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태 씨는 한국 방송사가 낳은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로 TV 브라운관에서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하고, 중저음의 맑음 음색, 그리고 빈틈없는 몸가짐으로 대중의 신뢰를 한 몸에 얻었던 방송인입니다.
그는 2009년 “B세포 미만성 림프종양”이라는 암을 진단 받았습니다. 의사가 “쉽게 나을 병이 아니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그런데 왜, 지금, 나여야 하느냐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구순(九旬)의 노부모를 떠올리자 심장이 비틀어지는 듯 아픔이 다가왔습니다.
항암치료를 9차례나 걸치면서 투병생활로 밤마다 울어야만 했고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져서 중환자실에 들어가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딸들이 병원에 왔을 때는 연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삶의 자세가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침 식사 때마다 “맨손으로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 피난민으로...”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기도로 자신이 이 자리까지 왔다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신앙적으로 보면 내게 또 다른 소명이 있어서 이런 연단을 주시지 않았나 싶다. 내려놓음, 나눔, 섬김..., 그런 단어들을 요즘 많이 생각한다.”
인간은 고난을 겪을 때에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처절한 고통의 시간들에 대하여 대처하는 삶의 자세가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추가) 차인태 아나운서는 평안북도 벽동군 출생이며 아호는 벽동(碧潼)이다. '벽동'이라는 그의 아호 역시 출생지 이름에서 딴 아호이다. 1965년 DBS 동아방송 주최 전국 대학방송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1966년 7월에는 서울중앙방송(지금의 KBS 한국방송공사)에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본 과정까지 수료하였다가 1967년 2월에 서울중앙방송에서 퇴사, 한 달 후 1967년 3월에 학군사관 임관하여 군 복무를 마치고 예편한 후, 1969년 2월에는 MBC 문화방송의 정식 아나운서로 입사하였다.
문화방송에서 고등학생들의 퀴즈 프로그램인 《장학퀴즈》와 《남북이산가족 상봉실황》, 《MBC 뉴스데스크》, 《차인태의 아침 살롱》 등의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고, 각종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로도 활동해 문화방송의 대표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문화방송 편성이사를 지내다가 1994년 제주MBC 사장을 지내었으며 이후 문화방송 직위 체제에서 전격 퇴임하였고 이후에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이사장, 경기대학교 다중영상매체학과 교수 등을 지내었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부모와 함께 월남한 실향민으로, 6세 시절이던 1949년에 일가족을 동반하여 고향 평안북도 벽동을 떠나 월남 이후 경상북도 경주로 내려왔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성장하였다. 2001년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잠시 지내다가 퇴임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이북5도위원회의 명예직 가운데 하나인 평안북도 도지사를 역임하였고 그 재임 기간 사이에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8월에는 제주도 명예 도민으로 위촉된 바가 있으며 현재는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현재 서울 영락교회 장로로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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