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인생 28

돈을 사랑했던 주수일장로 회개 이젠 황금률의 기업으로

칠성섬유 회장 주수일 장로님은 선친이 원사도매업을 해서 창업한 회사를 승계 받아 경일합섬, 일성산업, (주)우성을 설립했고, 30세에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사를 위해 돈을 버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설치하는 등, 일 속에 파묻혀 청춘을 보냈습니다. 신앙생활은 점점 더 멀어졌고 주일에도 교회를 나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일을 하다가 얻게 된 불면증과 위장병으로 인해 잠도 못자고 밥도 먹지 못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을 한 후,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돈과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

인물과 인생 2020.06.06

성악가 김영미를 프리마돈나로 쓰시는 하나님

세계적인 성악가 김영미 씨가 CBS의 간증을 모은 책에서 간증하였다. 그녀는 외할아버지도 성악가셨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피를 이어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성악이 뛰어났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베로나 콩쿠르, 푸치니 콩쿠르에서 일등을 했다. “섬세한 테크닉과 화려한 목소리의 주인공” 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유력한 1등 후보였으나 우승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그때에야 이탈리아 음악계의 텃세를 절감하게 되었다. 상한 마음으로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았다. 오래 도록 공연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두려움과 허탈감과 우울증이 엄습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서야 하나님..

인물과 인생 2019.12.14

죠셉 스크리븐이 찬송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를 작사하게 된 이유

조셉 스크리븐(Joseph Scriven, 1819~1886)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스크리븐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 대학인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직업 군인이 되려고 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문학을 전공하고 교직에 몸담는다. 이 기간에 그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1843년, 결혼을 앞둔 스크리븐은 큰 비극을 맞이한다. 결혼식 하루 전날, 약혼녀가 자신을 만나러 오다 그만 강으로 떨어져 익사(溺死)한 것이다. 강 저편에서 사고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스크리븐은 큰 충격에 휩싸여 일상생활조차 하기 힘들었다. 2년이 지난 1845년, 스크리븐은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찾으려고 캐나다 온타리오로 떠난다. 10여 년이 흘러 마음의 ..

인물과 인생 2019.11.17

도스토예프시키에게 주어진 5분

러시아의 작가 토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그가 스물 여덟살 때 사회주의 혁명 단체 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세 사람이 기둥 에 묶이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최후의 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28년간을 살아왔지만 단 5분이 이처럼 금덩이같이 생각되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 5분을 어떻게 쓸까?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 마디씩 하는데 2분 걸리고, 오늘까지 살아온 생화를 정리해 보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자 -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설 백치 중에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곁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인사를 하였고 가족..

인물과 인생 2019.10.01

월남 이상재 선생 '기독교만이 유일한 길'

“기독교만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 원수까지 사랑한 신앙인 월남 이상재 - 54세에 감옥에서 회심, 열혈 독립운동가에서 기독 신앙운동가로 - 좌우 모두에게 존경받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장례에 10만 인파 몰려 서구 문물이 흔치 않던 일제강점기. 한 선교사가 비누를 선물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보겠다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비누를 싹둑 조각내 씹어 먹어 버렸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말리자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게 비누인 줄 압니다. 그러나 속은 더러운데 겉만 깨끗한들 무슨 소용이요? 나는 먼저 속부터 깨끗하게 하겠소.” 그가 바로 한국기독교가 낳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이다. 54세라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인으로 회심했지만..

인물과 인생 2019.08.31

상계동의 슈바이처 은명내과의원 김경희 원장

상계동에는 은명내과의원이 있다. 1984년에 설립된 이 병원은 정동교회 김경희 장로님이 원장으로 진료를 베풀고 있다. 그는 환자를 돌볼 뿐만 아니라 85년도에 은명장학회를 조직해 불우한 청소년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85년설립 이후 89년까지 자그마치 800명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었다. 중학생에게는 연간 28만원씩, 고등학생에게는 40만원씩 지급했다. 김 장로님은 은명심장수술후원회를 조직, 수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심장질환자들을 돕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이분이야말로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이다. 은명내과의원을 위해 김 장로님은 다음과 같은 소원을 잊지 않고 외우고 있다 한다. "은명의원, 사랑의 집 너는 소금과 빛이 ..

인물과 인생 2019.05.24

나는 다윗왕보다 행복하다는 천안 심복순 권사

호두과자를 개발한 심복순 권사 62년 전 이 호두과자를 개발, 천안의 명물로 만든 호두과자 할머니 심복순(82)씨가 신앙고백서 [나는 다윗왕보다 행복합니다]를 냈다. 조금씩 돈이 모이는 대로 세운 교회가 여섯 군데. 이미 터를 마련한 한 곳만 더 세우면 하나님과의 약속이자 자신의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머리는 하얗게 세고 엉성했지만 뽀얀 피부가 나이답지 않다. 책제목을 왜 [나는 다윗왕보다 행복합니다]로 정했는지 물었다. "다윗은 여러 사람의 피를 봤기 때문에 성전 짓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지요. 보잘것없는 제가 하나님의 성전을 일곱 군데나 세웠으니, 다윗왕보다 행복한 게 아닙니까?" 책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들어 있다. 신혼 초부터 계속된 남편의 바람기, 아들이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

인물과 인생 2018.11.11

하나님의 사람 무디가 회심하게 된 계기

하나님의 사람 무디 드와이트 레이만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미국이 남북전쟁 직후 침체되었던 시대에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당대에 세상을 움직일 사명을 하늘로부터 타고난 인물이었다. 한 교회사가가 그에 대하여 다음같이 말했다. “하나님께 완전히 몸을 바친 사람을 이용하여, 그를 위하여, 그를 통하여, 또한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평범한 사람을 더 많이 요구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학교 교육이라고는 불과 몇 학기밖에 받지 못하였고 성격이 난폭하고 심술궂은 아이였다. 그가 17세 되던 ..

인물과 인생 2018.11.11

대만최고의 부자 왕융칭 회장의 유언

맨주먹으로 대만 최대그룹 일군 故왕융칭 회장 “내 재산 사회 환원”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 화제 “돈이란 하늘이 잠시 빌려준 것 떠날땐 세상에 갚고 빈손으로…” “모두가 재부(財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 없고, 누구도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재산도 모두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예외가 없다.”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해 대만 최대의 그룹을 키운 왕융칭(王永慶·사진) 대만플라스틱그룹 회장이 지난달 15일 향년 91세로 숨지면서 자녀들에게 남겼던 편지가 공개됐다. 11일 홍콩 다궁(大公)보 등 중화권 언론에 따르면 편지에는 사회공헌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 “내가 노력해서 성취를 이뤘지만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회에 공헌하는 것, 그리..

인물과 인생 2018.11.11

김기창 화백, 봉사가 곁들여져야 예술이 된다

김기창 화백 제5회 인존상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는 78세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그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靜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봉사에서는 동적(動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4세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난 뒤, 후유증으로 7세 때 청각 장애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청각장애 증세가 나타나자 그림그리기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약 70년간 그림을 그린 그는 돈을 벌어서 청읍회관을 설립하고, 한국 농아복지회 회장이 되어서 매년 1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불행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 돈을 써 왔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인물과 인생 2018.11.11

애덕의 집을 세워 노숙자들을 돌본 김근영

자기 몸을 부수는 섬김 1985년 병석에서 카톨릭 대상 제3회 수상자로 뽑혀 수상의 영광을 누린 뒤 한 달도 채 안되어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김근영씨. 그는 국민학교만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행정고시 1차까지 합격한 집념의 사람이었다. 주경야독과 가족부양을 맡아보던 그는 25세 때 폐혈전증, 심부전증, 간경변, 위․십이지장 궤양등 거의 일곱 가지나 되는 합병증으로 의사로부터 불치의 통보를 받았다. 병원에 있을 때 그는 길바닥에 쓰러진 채 경찰 백차에 실려왔다가 쫓겨나가는 행려병자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퇴원 즉시 서울 시내 시립병원을 돌며 연고가 없는 병자들의 얼굴을 씻겨주고 머리를 감겨주는 등 봉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허름한 목조건물에 '애덕의 집'을 세워 ..

인물과 인생 2018.11.11

미얀마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의 생애

미얀마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n Judson 1788-1850)은 미국 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지금의 미얀마인 버마로 건너가 37년 동안 버마의 복음화를 위하여 애쓰다가 1850년 4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회중교회의 목사 아들로 태어난 은 젊은 시절 한때 하나님을 등진 때도 있었으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우여곡절 끝에 1813년 버마 랭구운에 상륙하게 됩니다. 당시 버마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지 않아 그의 선교 사역은 고통과 궁핍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열병과 이질로 인한 아내와 자녀의 죽음은, 버마를 향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감소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6년만에 처음으로 결신 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굳게 닫혀 있던..

인물과 인생 2018.11.11